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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火葬의 禁止

火葬의 禁止
조선 초기의 장법은 대체로 매장, 불교식의 화장, 훨씬 오래전부터 존재하였을 것으로 추측되는 세골장 등 이중장, 시체유기(屍體遺棄) 등이 혼재해 있던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조선 초기 상례를 유교화하는 데 있어서 가장 당면한 문제는 화장의 근절이었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불교식 장법(葬法)이기 때문이었다. 불교식 장례의 핵심은 시신의 화장과,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비는 추천(追薦)으로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절(佛寺)에서 불승(佛僧)의 도움을 받아 진행되는 것이었다.
사실 화장은 이미 고려 공양왕 1년(1389)부터 그 금지가 논의되었다. 이 때 헌사(憲司)는 "불교식 다비법(茶毘法)이 차마 사람이 행해서는 아니 될 불인(不仁)함이 심함"을 지적하고 ‘아비 없는 오랑캐의 가르침’에 따르는 화장을 엄금할 것을 상소하였다. 한편 공양왕 2년(1390)에는 大夫ㆍ士ㆍ庶人의 가묘를 세우는 일과 제사를 주자가례에 의해서 시행하도록 하는 법령이 제정되었다. 그리고 공양왕 3년에는 복제(服制)를 고쳐 대명률복제식(大明律服制式)을 따르도록 하고 3년상이 천하의 통상(通喪)임을 밝혔다. 그 후 조선조에 와서도 이와 같은 정책은 그대로 유지된다.
太祖 4년(1395)에는 헌사의 건의 중에 3일장과 화장의 금지가 논의되었고, 사사(使司)에 내려 신하들이 의논하도록 지시하였으나 구체적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당시는 이미 고려시대에 정해진 화장 금령(受判)이 시행 중이었기 때문에 이 논의는 화장금지를 다시 한 번 강조한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세종 대 사헌부의 건의는 보다 구체적이고 강력하다.
홍무 21년 사헌부의 수판(受判)인데, 장사한다는 것은 사람 시체를 갈무려 준다는 것이니, 그 해골을 감추어 밖에 드러나지 않게 하는 것이어늘, 요즈음에 불교도의 화장법이 성행하게 되어, 사람이 죽으면 들어다가 뜨거운 불 속에 넣어서 모발이 타고 살이 타 녹아 없어지게 하고 다만 해골만 남게 한다. 심한 자는 해골도 태워서 그 재를 뿌려 물고기나 날짐승에게 주고 말하기를, 반드시 이와 같이 한 뒤에야 극락에 가서 다시 태어날 수 있고 서방정토(西方淨土)에 갈 수 있다고 한다. (중략)
원컨대, 지금부터는 일체 화장을 금하고 이 법을 범한 자는 죄를 주게 하고, 지방의 인민들은 부모의 장삿날에 이웃 마을 사람과 향도(香徒)들을 모아놓고 술 마시고 노래 불러 조금도 애통한 마음이 없는 것 같으니, 예로서 풍속을 이룩하는데 누(累)가 되는 것이 말할 수 없으니, 역시 모두 엄금하라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종 1년(1470)에는 화장이 계속 시행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사헌부나 감사ㆍ수령이 보다 엄하게 금단할 것과 친족이나 가까운 향리로서 알고도 금하지 않는 자까지 중죄를 주라고 명령하였다. 이러한 법제화 혹은 명률(明律)의 적용 강화에도 화장은 합법적 또는 불법적으로 시행되었다. 비록 실록에 기록된 사례는 적지만 화장으로 인하여 처벌받는 자가 있다는 것은 이 시기에 화장이 비교적 널리 행해졌다는 증거가 된다. 한편 합법적인 화장은 승려의 다비, 먼 곳에 운구하는 어려움(運柩難)에 의한 화장, 버려진 시체의 처리, 전몰자의 처리 등에서 행하여졌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세종 14년에는 “상제(喪制)에 부도(浮屠)를 쓰지 않는 이가 10에 3~4”라고 할 정도로 성행하였는데 비하여, 성종 23년(1492)의 기사 중에는 “상례를 행하는 집에서는 부도를 쓰는 자가 드물다”는 기사가 보이는데 아마도 15세기 말에 와서는 화장이 거의 자취를 감추어 가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럼에도 후일 임진왜란 때 다음과 같은 실록의 기사가 등장한다.
3일에 순회 세자빈(順懷世子嬪) 윤씨(尹氏)가 졸(卒)하였다. 윤씨는 참판 윤옥(尹玉)의 딸로서 10세에 간택되어 덕빈(德嬪)에 책봉되었는데, 이듬해에 세자가 졸하였다. 그러나 인순 왕후(仁順王后)의 유명(遺命)으로 궁궐에서 나가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상이 또 왕세자를 세우지 않았으므로 빈이 그대로 동궁(東宮)에 거처하였다. … (중략) …  그리고 세자의 영혼을 기원하는 뜻에서 불공(佛供)을 자주 드렸으나 상이 가엾게 여겨 금지시키지 않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졸한 것이다. 시호를 공회(恭懷)라 하고 장차 세자원(世子園)에 부장(附葬)하려고 공사를 크게 일으켰는데, 갑자기 왜변(倭變)을 만나 미처 장례도 치르지 못한 채 상이 피난을 가게 되었다. 이에 빈소(殯所)를 모시고 있던 관리 몇 사람이 후원(後苑)에 임시로 매장하려 하였으나 재실(梓室)이 무거워 옮길 수 없었는데, 조금 있다가 궁전에 불이 나는 바람에 관리들도 모두 흩어져버리고 말았다. 이에 궁인(宮人)들이 그를 추모하고 비통해 하면서 말하기를 ‘빈이 살았을 적에 불교를 숭상하였는데, 우연히 화장(火葬)하게 되었으니 그것도 생전의 뜻에 부합된다.’고 하였다.
이 실록 기사의 주인공 세자빈은 당대 최고 사대부 집안의 딸이었을 것이다. 또 이 실록을 쓴 사관(史官)도 사대부였을 것이다. 그리고 화장을 금지하는 법률이 시퍼렇게 위력을 발하고 있던 때였다. 그런데도 세자빈의 시신이 불타버린데 대한 안타까움을 찾아 볼 수가 없다. 오히려 그것을 다행스럽게 여기는 듯 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왕실과 사대부들의 보여준 화장에 대한 이중적인 태도, 이만큼 조선 전기 사회에 화장이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고 보아도 좋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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