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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王陵과 民墓의 制式

王陵과 民墓의 制式
조선시대 묘의 구분은 피장자의 신분에 따라 능(陵)ㆍ원(園)ㆍ묘(墓)로 구분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다.<그림 1> 왕릉 배치의 기본모습(출처 ; 『한국 상장례』, 1990, 국립민속박물관) 陵은 왕과 왕비의 무덤이며, 園은 왕세자 및 왕세자비 및 왕의 사친(私親)의 무덤을 말한다. 그리고 墓는 능ㆍ원에 해당하지 않는 사대부 및 일반 서인(庶人)의 무덤을 말한다.
먼저 陵의 형식은 분묘조성 형태에 따라 단릉(單陵)ㆍ쌍릉(雙陵)ㆍ삼연릉(三連陵)ㆍ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ㆍ합장릉(合葬陵)으로 나뉜다.
능은 좌향(坐向)을 중요시하는데, 좌(坐)란 혈(穴)의 중심이 되는 곳이고, 좌의 정면이 되는 방향이 향(向)이다. 왕릉의 좌향을 보면 대부분 북에서 남으로 향하고 있다. 능의 뒤쪽에는 배산(背山)이 있고 송림을 배경으로 다음 <그림 3>과 같이 동ㆍ서ㆍ북 3면으로 곡장(曲墻, 또는 曲담)을 둘렀다. 곡장 안에 봉분을 만들고, 봉분의 밑 부분에 12각의 병풍석(屛風石)을 둘러 봉분의 토사가 흘러내리는 것을 예방했다. 봉분의 주위를 다시 난간석(欄干石)으로 둘러 보호했으며, 난간석은 석주(石柱)ㆍ죽석(竹石)ㆍ동자석주(童子石柱)로 구성되어 있다. 난간석 바깥으로 석호(石虎) 4기와 석양(石羊) 4기가 봉분을 호위하는 형상을 하고 있다.
봉분 바로 앞에는 상석(床石)이 설치되어 있는데, 상석 아래에는 귀면(鬼面)을 모양을 새긴 고석(鼓石)이 상석을 받치고 있다. 그리고 상석 좌우에는 망주석(望柱石) 1쌍을, 그 보다 조금 낮은 곳에 장명등(長明燈), 그 좌우에는 문인석(文人石)과 무인석(武人石)이 각각 석마(石馬)를 대동한 채 서있다.
제향(祭享)을 지내는 건물인 정자각(丁字閣)은 丁자 모양을 하고 있으며, 정자각 뒤에는 제향 후에 축문(祝文)을 태워 묻는 방형의 석함(예감이라고도 한다)이 있다. 정자각의 동편에는 능비(陵碑) 세워 보호하는 비각(碑閣)이 있고, 비각 아래쪽에 수복방(守僕房)이 있다. 정자각 정면으로 참도(參道)가 깔려 있고, 참도가 시작되는 곳에 홍살문(紅箭門)이 세워져 있으며, 홍살문 오른쪽에 배위(拜位)가 있고, 홍살문 밖 능역에 있는 재실에 능참봉이 상주했다.  조선 초기 능의 동남향에 신도비를 세웠으나 문종 이후에는 폐지하였다.
園과 종실(宗室)의 墓는 봉분ㆍ곡장ㆍ상석ㆍ정자각ㆍ재실 등은 대부분 능과 같이 갖추고 있으나 그 규모가 작고, 봉분의 병풍석과 난간석․무인석은 대부분 생략되었다.

민묘(民墓)를 살펴보면, 먼저 우리나라에서는 분묘를 주로 산에 만든다. 따라서 분묘를 산소(山所) 또는 뫼(山)라고 부르며 가족이나 문중 구성원의 묘가 모여 있는 곳을 선산(先山), 선영(先塋)이라고도 한다.
우리 전통사회의 민묘는 다음 <그림 4>과 같이 산의 경사진 면을 이용하여 묘역을 조성하는데, 맨 뒤쪽에 왕릉에서 곡장에 해당하는 외사성(外莎城)을 두르고 그 안쪽에 다시 내사성(內莎城)을 둘러 묘역 전체의 분위기를 아늑하게 하고, 북방을 가리고 좌우측을 북돋우는 (主山과 左靑龍右白虎를 의미하는 다소 풍수적인) 기능과 함께 상부에서 흘러내리는 빗물이 묘역 쪽으로 흘러드는 것을 막아 분묘의 침식을 방지하는 실질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다.
그 안의 분묘의 형태를 보면, 초선 초기에는 고려 묘제에서 계승된 호석(護石)을 두른 방형분(方形墳)이 일부 있었다. 점차로 왕공 이하 사대부들의 묘는 대개 원형이며, 일반 서민들의 묘는 대개 유형(乳形) 또는 돌형(突形)을 이루는데, 어느 경우나 정면에서 보면 반원형을 띠고 있다. 봉분과 사성을 연결하는 용미(龍尾)가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지맥을 봉분으로 이어주는 역할과 함께 빗물로부터 봉분의 피해를 막아주는 기능을 한다.
봉분의 앞 또는 우측에 묘표(墓表) 또는 묘갈(墓碣)을 세우고, 혼유석(魂遊石)과 지실(誌室)을<그림 1> 민묘의 평면도와 단면도(출처 ; 『한국 상장례』, 1990, 국립민속박물관) 마련한다. 그 앞에 상석(床石)과 향로석(香爐石, 香案石이라고도 한다.)을 놓고, 다시 그 앞에 봉분을 중심으로 좌우측에 1쌍의 망주석을 세운다. 여기까지가 일반적인 경우이며, 일부 경기지방의 조선시대 사대부 묘에는 장명등(長明燈), 동자석(童子石), 문인석(文人石), 석수(石獸) 등을 세운 경우도 있다.
그리고 墓에 있어서 대체로 상석의 좌우에 장대석(長臺石)을 이용하여 단(段)을 조성하고 있는데, 이 돌을 계체석(階砌石) 또는 제체석(祭砌石)이라 부르고, 이것을 중심으로 묘역은 계절(階節)과 배계절(拜階節)로 구분된다.
이처럼 묘역에 있어서 있어서의 계체석은 묘역을 안정감 있게 구분하고 석물의 배치를 용이하게 하여 전체적으로 묘역의 규모를 정하는 기능을 하게 된다.
조선시대 묘제의 사상적 기반은 먼저, 조선의 건국 통치이념인 성리학이 묘제에 상당한 영향을 주고 있다. 이에 따라 분묘의 규모(면적)를 품계(品階)에 따라 차등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도비나 묘비의 입석(立石) 행위 자체에도 영향을 주었다. 고려시대와 달리 조선시대는 무덤에 세우는 비가 크게 유행하였는데, 이는 유교의 윤리적 가치관에 입각해서 조상에 대한 숭모의 방법으로 일정한 격식(格式)에 맞춰 묘비를 세우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 초기에는 주자성리학이 일부 선진적인 지식계층에 의해서만 이해되던 수준이어서 묘비의 입석도 이들에게 한정되었다. 하지만 후기로 갈수록 사대부(士大夫)뿐만 아니라 일반 중․서인층(中ㆍ庶人層)까지도 묘비를 무질서하게 건립하게 됨으로써 이를 규제하기도 하였다.
둘째,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 또한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風水는 사상은 부모의 시신을 생기가 있는 좋은 땅에 모심으로써 동기감응(同氣感應)으로 자손이 번성을 이루고, 자손의 번성에 따라 봉제사(奉祭祀)가 끊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 효도의 극치로 받아 들었다. 이것은 효를 중시하는 유교사상과도 부합되어, 택지(擇地), 무덤의 좌향(坐向), 석물의 위치, 합장의 방법 등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셋째, 조선시대 전기에 있어 불교의 영향도 무시할 수가 없다. 太祖에서 太宗대에 주자가례를 기본으로 하는 유교식 상장례의 실시는 집권 사대부 계층조차 잘 지켜지지 않았으며 여전히 무불적(巫佛的) 요소가 혼합된 상장의식이 성행하였다. 그 결과 조선 초기 능묘에 불교의 상징처럼 되어 있는 연화문(蓮花紋)이 碑의 양식으로 나타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묘지(墓誌), 출토의(出土衣) 등을 장식하는 문양(文樣)으로 나타났다가 후대에 이르면 완전히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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