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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陰宅 風水地理의 성행

陰宅 風水地理의 성행
조선왕조는 유교를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삼으면서 개창되어, 기존의 종교 의례 또한 유교에 맞게 정비되어야만 했다. 국가에서는 종묘(宗廟)ㆍ사직(社稷) 등의 국가경영에 합당한 특정 목적의 제사를 관장했고, 민간에서는 주자가례에 따라 가묘를 세우고 그 곳에서 행하는 조상제사만이 국가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보편적인 의례가 되었다. 그리고 민간에서 죽은 조상 제사 이외에 어떠한 의례도 국가의 허락 없이 행할 때는 음사(淫祀)라 하여 제한하였다.
그런데, 고려시대를 이끌어 왔던 불교와 달리, 조선시대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던 유교는 신앙이라는 측면에서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문제는 유교에는 신앙의 대상이 되는 절대 신격(神格)이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과, 신에 의지한 자기구복(自己求福)과 내세사상(來世思想)의 미비 등으로 설명할 수가 있을 것이다. 또한, 유교의 조상제사에는 죽은 조상에 대한 보본(報本)사상은 있어도 살아있는 자를 위한 기양(祈𧟄)체계는 없다. 따라서 백성들은 유교사회가 제시한 조상숭배의례에 풍수사상을 끌어들임으로서 유교의 조상숭배사상에서 결핍된 종교적 욕구 즉, 자기구복체계를 묘지풍수신앙에서 찾게 되었다.
<그림 1> 풍수지리에 의한 산국의 그림이들 신앙의 목표에는 다분히 현세적 열망이 강하게 작용하면서 도덕적 각성은 요구되지 않았고, 그 외형적인 표출 자체는 이기적인 양상을 띠었다. 이미 일정한 신앙체계가 집단경험으로 형식화되었고, 신앙의 내용보다는 형식이 중요시되면서 이기적인 사회현상으로 나타났던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묘지 풍수신앙의 본질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조선왕조에서 유교적 사회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민간의 의례를 통해 영적 세계를 통제하고자 했으나 오히려 빗나가 버렸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왕실을 비롯하여 사회 전반에 불교가 아직 영향력을 지니고 있던 조선 초기에 묘지 풍수신앙이 그다지 표출되지 않았던 것에 비하여, 조선 중기 이후 풍수신앙이 보다 극성을 띠게 되어 산송이 빈발하게 되는 것도 이런 사상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고려시대는 물론 조선사회에서 풍수지리는 전문기술직으로 대우를 받았다. 조선시대 관리를 등용하는 과거시험에 음양과(陰陽科)가 포함된 것이다. 양반 계층이 응시할 수 있는 문과와 무과 외에, 중인(中人) 계층을 대상으로 한 잡과(雜科) 시험에는 역과(譯科)ㆍ의과(醫科)ㆍ율과(律科)ㆍ음양과가 있었다. 음양과는 영의정이 겸임하는 관상감(觀象監)의 주관 아래 천문학ㆍ과학ㆍ지리학으로 나뉘었다. 지리학 시험은 3년마다 보는 식년시의 초시에서 4명을 선출한 다음, 복시(覆試)에서 2명을 뽑았다. 이들은 궁궐 및 왕릉의 선정과 이전 등에 관한 실무를 담당하였다. 흔히 풍수가를 ‘지관(地官)’이라고 부르는 데는 것은 바로 이들에게서 유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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